로봇이나 자동차, 항공기 같은 제품을 설계할 때 엔지니어가 가장 많이 쓰는 도구는 시뮬레이션이다. 부품이 힘을 받으면 어디가 부러지는지, 공기가 흐르면 저항이 얼마나 생기는지를 미리 계산해보는 작업이다.
이때 쓰이는 대표적인 방법이 유한요소해석(FEA)과 전산유체역학(CFD)인데, 둘 다 결국 물리 현상을 미분방정식 형태로 바꾼 뒤 컴퓨터로 하나씩 풀어내는 방식이다. 문제는 속도다. 자동차 공력 하나 계산하는 데 몇 시간, 항공기 구조 해석은 하루 이상 걸리는 경우도 흔하다.
설계를 조금 바꿀 때마다 이 과정을 다시 돌려야 하니 시간이 그대로 비용이 된다.
최근 AI가 이 병목을 정면으로 건드리고 있다. 핵심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매번 방정식을 처음부터 푸는 대신, 입력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통째로 외워버리는 것이다.
과거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대량으로 학습해 “이 조건이면 결과가 이렇게 나온다”는 패턴을 만들어두고 새로운 설계가 들어오면 계산을 다시 하지 않고 바로 예측해버리는 방식이다. 이걸 surrogate model이라고 부른다. 기존 해석이 문제를 푸는 과정이라면 이건 문제와 답 사이의 관계를 기억하는 쪽에 가깝다.
이 흐름에서 가장 주목받는 개념이 neural operator다. 기존 AI 모델이 숫자 몇 개를 입력받아 숫자 몇 개를 내놓는 구조였다면 neural operator는 함수 전체를 입력받아 함수 전체를 출력한다.
예를 들어 공기 흐름이라면 속도와 압력이 공간 전체에 어떻게 퍼져 있는지를 한 번에 예측한다. 대표적인 모델이 Fourier Neural Operator인데, 물리 현상을 푸리에 변환이라는 방식으로 바꿔서 복잡한 패턴을 더 쉽게 잡아내는 구조다.
특정 조건에서는 기존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근사 결과를 내놓을 수 있어 설계 탐색 속도를 크게 끌어올리는 데 쓰인다.
DeepONet 계열은 접근이 조금 다르다. 이쪽은 “상황이 바뀌면 결과가 어떻게 바뀌는지” 자체를 배우는 모델이다. 초기 조건이나 경계 조건 같은 입력을 함수 형태로 받아서 그에 대응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쉽게 말하면 하나의 정답을 외우는 게 아니라 상황과 결과를 연결하는 규칙을 통째로 학습하는 구조다. 그래서 조건이 조금씩 바뀌는 설계 문제에서 활용도가 높다. 다만 형상이나 조건이 학습 범위를 크게 벗어나면 정확도가 떨어지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물리 법칙을 아예 모델 안에 넣어버리는 방식도 있다. Physics-Informed Neural Network, 줄여서 PINN은 학습 과정에서 물리 방정식을 틀리면 벌점을 주는 식으로 훈련된다. 데이터가 많지 않아도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결과를 덜 내도록 유도하는 구조다.
다만 실제로는 난류처럼 복잡한 유동이나 강한 비선형 문제에서는 학습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단독으로 쓰기보다는 기존 시뮬레이션 데이터와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구조 해석 쪽에서는 reduced-order model과 AI를 결합한 방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원래는 수십만 개 이상의 자유도를 가진 시스템을 그대로 계산해야 했지만 중요한 패턴만 추려서 저차원으로 줄인 뒤 빠르게 예측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recurrent neural network나 transformer 같은 구조를 붙여 시간에 따라 변하는 진동이나 변형까지 추론하는 모델이 등장했다. 이 방식은 구조동역학이나 탄소성 재료 해석처럼 복잡한 문제에서도 실제 활용 사례가 늘고 있다.
CFD 분야에서도 변화는 비슷하다. 기존에는 설계안을 수백 개만 테스트해도 계산 비용이 크게 늘어났지만, surrogate 모델을 한 번 학습해두면 수천 개 설계안을 거의 동시에 스캔할 수 있다. 자동차 공력 설계, 데이터센터 냉각, 건물 환기 같은 분야에서 실제 비용 절감 효과가 확인되고 있다.
설계자가 시간과 비용 관계상 “이게 될까?”를 몇 번만 확인하던 시대에서 “이 중에서 뭐가 제일 좋은지”를 대량으로 비교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흐름이다.
이 기술은 이미 상용 소프트웨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엔비디아는 PhysicsNeMo라는 프레임워크를 통해 물리 기반 AI 모델을 제공하고 있고 앤시스는 SimAI 기능으로 과거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학습해 새로운 설계를 빠르게 예측하는 기능을 내놨다.
지멘스와 알테어도 reduced-order model과 AI를 결합한 설계 탐색 기능을 제품에 포함시키고 있다. 예전에는 해석을 빠르게 하는 게 목표였다면, 이제는 설계를 많이 돌려보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고 있다.
최근에는 한 단계 더 나간 시도도 등장하고 있다. 다양한 물리 문제를 미리 학습해두고 특정 산업 문제에 맞게 조정하는, 이른바 ‘foundation model’ 형태의 물리 AI다. 아직은 연구 단계에 가깝지만 특정 문제에 특화된 모델을 만드는 대신 범용 모델을 가져다 쓰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한계는 분명하다. surrogate 모델은 학습한 범위를 벗어나면 정확도가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형상이 크게 바뀌거나 조건이 달라지면 엉뚱한 결과를 내놓는 경우도 있다. 물리 법칙을 완벽하게 만족하지 못하는 문제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실제 산업에서는 AI 모델을 단독으로 쓰기보다는 기존 해석기와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빠르게 후보를 좁히는 데는 AI를 쓰고 최종 검증은 기존 시뮬레이션으로 하는 식이다.
제품 설계와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산을 빨리 하는 게 아니라 설계를 많이 해보는 것이다. AI 덕분에 엔지니어가 검토할 수 있는 설계 개수가 수십 개에서 수천 개로 늘어나면서 기계공학의 설계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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