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간 군사 충돌이 발생하자 글로벌 금융시장은 빠르게 요동쳤다. 중동 정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원유 가격이 뛰고 주요 증시는 변동성이 확대됐다. 코스피 또한 하루에 10%를 오르거나 10%를 내리는 등 극단적인 변동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투자자들이 당연하게 기대했던 금의 급등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면 항상 오르곤 했던 금 가격이 오히려 제한적인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안전자산의 대표격으로 불려온 금이 이번에는 별다른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사진 출처: goldprice.org)
실제로 금 가격의 움직임을 시간 순서대로 보면 상황은 더욱 흥미롭다. 미국의 이란 공습이 발생하기 직전인 2월 27일 국제 금 가격은 트로이온스당 약 5200달러 수준에서 거래됐다.
공습 소식이 전해지자 안전자산 수요가 몰리면서 금은 단기간에 급등했고 일부 시장에서는 5390달러를 넘는 가격까지 기록했다. 전쟁이 발생하면 금이 오른다는 기존 공식이 그대로 작동하는 듯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상승세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며칠 뒤 달러 강세와 국채금리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금 가격은 5070달러 부근까지 빠르게 밀려났다. 이후 가격은 다시 반등했지만 3월 중순 현재까지도 전쟁 직후 기록했던 고점 근처로 돌아가지 못한 채 5200달러 안팎에서 등락을 이어가고 있다.
금 가격의 이런 흐름은 관련 금융상품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금 현물에 투자하는 상장지수펀드들은 상승폭이 1% 내외에 그쳤고 금 선물을 추종하는 ETF 일부는 오히려 하락세를 기록했다.
금 채굴 기업에 투자하는 ETF 역시 주가가 밀리며 전쟁 국면에서 기대됐던 ‘금 랠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금 가격이 빠르게 상승하던 과거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장면이다.
시장에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나왔다. 중동 충돌이 유가 급등을 촉발하면서 인플레이션 우려와 금리 전망이 변했다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달러 강세가 안전자산 자금을 빨아들였다는 해석도 나온다. 또 최근 금 시장 구조가 ETF 중심으로 변하면서 가격이 거시 변수에 더 민감해졌다는 평가도 이어진다.
그러나 전쟁이 났는데 금이 왜 안 오르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시장참여자들은 여전히 많다. 그렇다면 애초에 시장은 왜 위기가 발생하면 금이 오를 것이라고 믿어 왔을까. 그리고 그 믿음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공식일까.
전쟁이 터지면 금이 오른다는 믿음은 어디에서 왔을까?
금이 위기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자산이 된 이유는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된 경험 때문이다. 전쟁이나 금융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각국의 통화 가치와 금융 시스템이 흔들렸고 그 과정에서 금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확인됐다.
이 경험이 축적되면서 금융시장에는 ‘위기에는 금’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사진 출처: Macrotrend)
대표적인 사례는 1970년대다. 당시 중동에서 발생한 석유 파동과 냉전 긴장이 겹치며 글로벌 경제는 심각한 혼란을 겪었다. 인플레이션이 급등하고 주요 통화 가치가 흔들리자 금 가격은 급격히 상승했다. 1971년 온스당 35달러 수준이었던 금 가격은 1980년 800달러를 넘어서며 폭등했다.
전쟁이 발생할 때 금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금이 특정 국가의 신용에 의존하지 않는 자산이라는 점이다. 주식은 기업의 가치에 묶여 있고 채권은 정부나 기업의 신용에 묶여 있다.
반면 금은 어느 나라의 재정 상태나 통화 정책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마음대로 찍어낼 수도 없다. 그래서 금융 시스템 자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는 위기 상황에서는 금이 ‘최후의 화폐’처럼 인식돼 왔다.
1990년 걸프전이 발발했을 때도 금 가격은 단기간 급등했고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도 안전자산 수요가 증가하며 금 가격 상승세가 이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대형 충격이 발생할 때마다 금이 투자 자금을 흡수하는 모습이 나타나면서 ‘위기 → 금 상승’이라는 패턴은 금융시장 참가자들의 상식이 되었다.
미국-이란 전쟁 때는 금값이 생각만큼 많이 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이번 중동 충돌 이후 금 가격을 가장 강하게 압박한 변수는 금리 전망의 변화였다. 전쟁이 발생하면서 국제 유가가 빠르게 상승했고 이는 곧바로 인플레이션 우려로 이어졌다.
중동은 글로벌 에너지 공급의 핵심 지역이고 특히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원유 수송의 중요한 통로로 꼽힌다. 군사 충돌이 확대될 가능성이 제기되자 시장에서는 에너지 공급 차질 가능성을 먼저 반영했고 원유 가격은 단기간에 크게 뛰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유가 상승은 소비자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고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전망을 바꾼다. 전쟁 이전까지 시장에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지만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인플레이션이 다시 자극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금리 인하 시점이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빠르게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금 가격에 직접적인 하방 압력으로 작용한다. 금은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자산이기 때문에 금리가 높아질수록 투자 매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같은 안전자산이라도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채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금을 보유할 유인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 이후 미국 국채금리가 상승하면서 금 가격은 단기간 급등했던 상승분을 상당 부분 반납했다. 그래서 이번 충돌에서 금 가격을 결정한 핵심 변수는 전쟁이 촉발한 거시 경제 환경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이번 위기에서 자금의 이동 통로가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 전쟁과 위기에서 금이 먼저 움직였던 이유는 당시 금융 시스템의 핵심 불안이 ‘통화 가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많은 국가들은 금본위제나 그에 가까운 통화 체제를 유지했고 전쟁이 발생하면 정부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통화를 급격히 늘리거나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선택을 하곤 했다.
실제로 두 차례 세계대전과 1970년대 석유 위기 시기에는 통화 가치 불안과 높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했고 이때 금 가격은 폭등했다. 금융 시스템이 불안해질 때 통화 대신 금을 보유하려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위기 → 금 상승’이라는 공식이 생겼다.
하지만 최근 금융시장은 위기의 성격 자체가 달라졌다. 현대 금융 시스템은 거의 모든 거래와 자산이 달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구조다.
국제 무역 결제의 대부분이 달러로 이뤄지고 글로벌 금융기관의 부채와 자산 역시 달러 기반으로 연결돼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 투자자들이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이 통화 가치가 아니라 유동성이다.
금융시장이 급격히 흔들리면 기업과 금융기관은 채무 상환과 거래 결제를 위해 달러 현금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위기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달러 수요가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달러 다음 단계에서 자금이 이동하는 곳은 미국 국채다. 미국 국채 시장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채권 시장으로 규모가 20조 달러를 훌쩍 넘고 하루 거래량도 압도적으로 많다.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대규모 자금을 동시에 움직여도 시장이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유동성이 풍부하다.
위기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자산을 빠르게 현금화할 수 있는 시장을 선호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국 국채로 자금이 몰리게 된다.
이 때문에 최근 금융시장에서는 안전자산 자금 이동의 순서가 바뀌는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과거에는 전쟁이나 위기가 발생하면 자금이 먼저 금으로 이동하고 이후 달러가 강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투자자들이 먼저 달러를 확보하고 이어 미국 국채를 매수한 뒤 마지막 단계에서 금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나타난다. 이번 중동 충돌에서도 이러한 순서가 반복되면서 금 가격 상승폭이 예상보다 제한되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금은 더 이상 전쟁이 났을 때 안전자산이 아닌 것일까.
이번 중동 사태를 두고 금의 안전자산 지위가 약해졌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결론을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금이 위기 상황에서 움직이는 방식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점은 확실하다.
가장 큰 이유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규모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현재 글로벌 금융자산 규모는 수백조 달러에 이르는데 금 시장의 규모는 약 13조 달러 수준으로 상대적으로 작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막대한 자금이 한꺼번에 금으로 이동하면 가격이 급등하지만 동시에 변동성도 크게 확대된다.
이런 특성 때문에 기관 투자자들은 금을 본격적인 위기 대응 자산으로 간주하지 않고 포트폴리오의 일부로만 제한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중앙은행의 역할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여러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를 다변화하기 위해 금을 꾸준히 매입해 왔다. 이는 금이 장기적으로 통화 가치 불안을 헤지하는 자산으로 여전히 중요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글로벌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 규모는 최근 수십 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금이 단기 금융시장보다 장기적인 통화 안정 자산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금은 여전히 위기 상황에서 일정한 안전자산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방식은 과거와 달라졌다. 지정학적 충돌이 발생하면 금이 일시적으로 상승하는 반응은 여전히 나타나지만 이후 가격의 방향은 달러와 금리, 글로벌 자금 흐름 같은 거시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중동 사태에서 나타난 금 가격의 움직임 역시 이렇게 변화한 시장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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