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7월 2일 페리 제독이 미국 함대를 이끌고 에도만 어귀에 나타난 순간부터 미국-일본 무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플라자 합의’는 그 역사의 정점이자 국제 경제사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미국은 고금리 정책과 재정적자 확대가 겹치며 달러 가치가 과도하게 높아졌고 그 결과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반대로 일본과 서독은 미국을 상대로 자동차와 기계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막대한 흑자를 기록했다. 달러 강세 덕에 일본차와 독일산 기계가 미국 시장에서 세일 상품처럼 팔린 셈이다. 결국 미국은 이 불균형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고 주요 5개국이 협의해 달러 가치를 낮추고 엔화와 마르크화를 끌어올리는 데 합의했다.

(사진 출처: Gemini 생성 AI 이미지)
이른바 플라자 합의다. 그 후 달러는 급락했고 일본 경제는 엔고 압력 속에서 자산 버블이 형성되며 향후 수십 년간 이어질 장기 저성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40년이 흐른 지금 플라자 합의는 무역 분쟁이나 환율 조정 합의를 넘어선 국제 공조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하지만 그 후폭풍은 일본 경제의 체질을 뿌리째 바꿔놓았다. 엔고 압박 속에서 거품이 꺼지고 장기 불황이 시작되자 일본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해외 생산거점을 대거 확대했다.
내수 시장만 바라보던 성장 모델은 무너졌고 대신 글로벌 가치사슬에 깊숙이 편입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미국과 일본의 무역 관계도 크게 달라졌다. 40년 전에는 자동차와 전자제품 같은 소비재가 양국 갈등의 중심에 있었지만 2025년 무역 협상에서는 반도체와 제약, 그리고 인공지능, 바이오 등 첨단기술이 협상의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1985년에는 제조업과 환율이 최대 쟁점이었다면 2025년 오늘날 미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 전장은 기술과 공급망이라는 점에서 시대적 대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번에는 자동차, 반도체, 제약, 배터리 등 핵심 산업의 규칙을 누가 주도할 것인가가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자동차 산업부터 변화가 뚜렷하다. 과거에는 일본에서 생산한 차량을 대량으로 미국에 수출해도 환율 덕에 충분히 이익이 났지만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다.
미국-일본 협상 과정에서 관세와 보조금 정책이 꼬이며 일본에서 만든 차량의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실제로 일본의 대(對)미 수출 물량은 감소세를 보이고 있고 일부 모델은 가격 인상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따라 일본 완성차 업체들은 북미 현지 생산을 확대하는 한편 일본 국내 공장은 고급차와 하이브리드 중심으로 재편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는 정부 주도의 산업 재건이 본격화됐다. 일본은 소재와 장비에서의 강점을 기반으로 국내 반도체 생산 역량을 강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구마모토에서 가동을 시작한 TSMC 합작 공장에 이어 2공장 착공이 확정됐으며 수천억 엔 규모의 정부 보조금이 지원됐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미국과 보조를 맞춰 대중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있어 장비, 소재 업체들의 매출 구조가 일본과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다만 일본이 독자적으로 가진 힘도 뚜렷하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와 장비 분야에서 여전히 세계적인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포토레지스트, 웨이퍼, 불화수소 등 핵심 소재는 일본 기업 없이는 생산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미국 역시 일본을 끌어들여야만 대중국 수출 규제와 공급망 통제가 실효성을 가질 수 있다. 쉽게 말해 주도권은 미국이 갖지만 그 주도권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일본의 참여가 필수적인 구조인 셈이다. 그래서 반도체 부문에서 일본은 단순히 따라가기만 하는 수동적 플레이어라기보다는 ‘없어서는 안 되는 퍼즐 조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약 분야 역시 첨예한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다. 미국은 일본에 미국산 신약 승인 절차를 단순화하고 약가 책정 과정을 투명하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국민건강보험 제도와 직결된 민감한 사안이라 양보가 쉽지 않지만 현 제도를 유지하면 미국산 신약 도입이 지연되는 ‘드러그 래그’ 문제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제도가 개편되면 환자는 신약을 더 빨리 사용할 수 있지만 기업은 약가 압박으로 수익성이 악화되는 딜레마에 직면한다. 일본 제약사들이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 이유이며 이번 미국-일본 협상의 핵심 의제이기도 했다.
배터리와 핵심 광물 분야도 협상의 핵심 축이다.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자국 내 공급망을 강화하자 일본 기업들은 전략을 전면 수정했다. 동남아와 북미에 합작 정제 시설을 세우고 핵심 광물 장기 계약을 확보하며 IRA 요건 충족에 나선 것이다. 단순히 수출길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 미국 시장에서 ‘보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일본 기업들 입장에서는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북미 시장 점유율을 안정적으로 지키는 동시에 미국 내 생산 보조금과 세제 혜택까지 끌어오는 것이 최종 목표다. 광물 조달과 제휴 전략을 선제적으로 짜두지 않으면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에서 주도권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본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번 미국-일본 협상의 본질은 일본 산업 구조 전반을 재편하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동차는 현지화, 반도체는 내재화, 제약은 제도 개편, 배터리는 해외 동맹 확대라는 키워드로 압축된다. 플라자 합의가 환율 충격으로 일본 경제의 체질을 뒤흔들었다면 이번 협상은 보조금, 규제, 안보를 통해 일본 산업의 미래를 다시 쓰고 있다.
※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맥락을 읽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과거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과거는 다양한 영역에서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눈에 쉽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거로 보는 현재의 인사이트를 하나의 기사로 풀어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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