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가 불과 1년 사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공지능(AI) 투자를 끌어들이는 국가로 부상했다. 구글·테마섹·베인앤드컴퍼니가 공동 발간한 ‘e-Conomy SEA 2025’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하반기부터 2025년 상반기까지 말레이시아가 유치한 AI 투자액은 7억5900만 달러(약 1조 원)로 동남아 전체 AI 투자금의 32%를 차지했다.
AI 투자가 싱가포르·인도네시아·베트남 등 기존 기술 허브보다 말레이시아에 집중된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같은 변화는 말레이시아가 지난 2년간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설을 공격적으로 추진하며 ‘AI 인프라 기지’를 가장 빠르게 확장한 결과다. 데이터센터는 AI를 학습시키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서버·네트워크·전력 설비가 모여 있는 기반 시설로, AI 경쟁력의 핵심 요소다.
보고서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의 데이터센터 용량은 2024년 120메가와트(MW)에서 2025년 상반기 690MW로 크게 늘었다. 용량은 서버가 쓸 수 있는 전력 규모를 뜻하며 클라우드·AI 서비스 제공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
더 주목되는 점은 확장 속도다. 말레이시아는 앞으로 데이터센터 용량을 추가로 350% 이상 늘릴 계획을 갖고 있으며, 현재 동남아 전체에서 예정된 신규 용량의 절반이 말레이시아에 집중돼 있다. 국가 차원의 ‘인프라 먼저(Infrastructure-first)’ 전략이 그만큼 과감하게 실행됐다는 말이다.
이 전략의 효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구글은 말레이시아에 2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공식 발표하며 자국 내 첫 데이터센터와 첫 번째 구글 클라우드 리전을 구축한다고 밝혔다. 구글이 특정 국가에 리전(region)을 설치한다는 것은 해당 지역을 세계 클라우드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으로 편입시키는 결정이다.
말레이시아 디지털경제부는 “AI 수요 증가와 기업들의 클라우드 전환 흐름을 고려한 계획”이라고 밝혔다.
말레이시아가 투자 중심지로 떠오른 또 다른 이유는 ‘비용·입지·안정성’의 3박자가 동남아에서 가장 유리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전력·임대료·토지비용이 워낙 높아 신규 데이터센터 건설을 제한하고 있고 인도네시아는 도심 기반 인프라가 아직 부족하다.
반면 말레이시아는 상대적으로 넓은 부지, 안정적인 전력망, 자연재해 위험이 낮은 지형을 기반으로 글로벌 IT 기업들이 선호하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ICT 투자 보고서는 말레이시아를 ‘싱가포르의 자연스러운 대체지’로 평가하며, “향후 AI 인프라 투자가 가장 많이 몰리는 국가”로 전망하고 있다.
다만 말레이시아의 투자 구성이 모두 건강한 구조는 아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7억5900만 달러라는 큰 투자 유입액 중 상당 부분이 금융 관련 딜, 특히 디지털 금융 서비스 분야에서 발생한 대형 거래 한 건이 전체 규모를 끌어올린 영향이 크다.
2025년 상반기 말레이시아 전체 디지털 경제 투자 건수는 23건으로 2021년 236건 대비 큰 폭으로 줄어 ‘투자 수의 다양성’은 오히려 낮아졌다. 즉 평균 투자 규모는 커졌지만 거래의 폭은 좁아진 상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투자자들의 기대는 높다. 보고서에서 조사된 투자자 중 64%는 “말레이시아 AI와 디지털 분야 투자가 2030년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답했다. 특히 소프트웨어·AI 서비스·딥테크 등 금융 분야 외 영역에서도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말레이시아가 지난 12개월간 동남아에서 전체 IPO 상장의 절반을 차지하며 ‘투자 회수(Exit)’ 구조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AI 소비자 수요도 말레이시아의 성장 추세를 뒷받침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디지털 소비자의 74%가 매일 AI 기능을 사용한다고 답해 동남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AI 챗봇과 대화하거나 질문을 한다고 답한 비율도 68%에 달했다. 이는 매우 적극적인 사용 행태를 보이는 것으로 서비스 기업 입장에서 ‘상품화 가능한 AI 시장’이 이미 형성됐다는 의미다.
AI에 대한 신뢰도도 매우 높다. 말레이시아 소비자 중 55%는 “AI가 인간보다 더 빠르고 적은 노력으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답했다. 이런 신뢰는 앞으로 기업이 더 많은 AI 자동화 기능을 도입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실제로 AI 기능을 강조한 앱의 매출은 2025년 상반기 기준 전년 대비 103% 증가했다.
말레이시아의 AI 도약에 가장 중요한 변수는 ‘인프라 투자 이후를 어떻게 고유 기술과 산업 생태계로 확장하느냐’다. 현재 말레이시아는 ILMU라는 자국 최초의 대규모 언어모델(LLM)을 디지털 은행에 적용하며 자체 AI 모델 개발을 시작했다. 다만 규모 면에서는 아직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려면 갈 길이 멀다는 평가도 있다.
규제 환경도 향후 흐름을 좌우한다. 예를 들어 새로 시행되는 ‘소비자신용법(Consumer Credit Act)’처럼 디지털 금융 규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은 AI 기반 서비스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데이터 보호·AI 책임성·알고리즘 투명성 등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투자 매력도가 달라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말레이시아가 확보한 AI 투자 규모는 분명 지역 1위지만 이를 실제 기술 경쟁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성공 여부는 인프라에 모인 자본을 기반으로 자체 AI 기술·국가 소비 시장·규제 체계를 얼마나 조화롭게 발전시키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다.
말레이시아는 지금 동남아 AI 시장의 중심에 서 있다. ‘AI 데이터센터의 나라’로 남을지, ‘AI 기술을 만드는 나라’로 성장할지에 따라 그 미래는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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