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엔비디아의 중국 수출용 AI 반도체인 H20 칩에 대한 추가 수출 규제를 당분간 보류한 배경을 두고 정치와 산업 정책이 맞물린 복합적인 판단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 사안은 미국이 추진해온 대중국 첨단 기술 통제 기조와 미국 내 AI 인프라 투자 확대 전략이 한 지점에서 충돌한 사례다.
H20은 엔비디아가 미국의 기존 반도체 수출 규제를 피해 중국 시장에 공급하기 위해 설계한 AI 가속기다. 미국은 2022년 이후 첨단 반도체가 중국의 군사 및 전략 기술 발전에 활용될 가능성을 문제 삼아 연산 성능과 데이터 처리 능력이 일정 기준을 넘는 칩의 대중국 수출을 제한해왔다.
이에 따라 엔비디아는 최상위 제품인 H100과 H200 대신 성능을 낮춘 H20을 별도로 설계했다. 이 칩은 연산 속도와 메모리 대역폭이 제한돼 있지만 대규모 언어 모델 학습과 추론에는 여전히 활용이 가능해 중국 기업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이 H20이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공개한 R1 모델 학습에 사용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딥시크의 R1은 공개 당시 미국의 주요 AI 연구소들이 만든 모델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성능을 보였고 이 과정에서 사용된 하드웨어가 H20이라는 점이 미국 의회와 안보 당국의 우려를 자극했다.
민주당과 공화당 소속 일부 상원의원들은 H20 역시 사실상 첨단 AI 개발에 활용될 수 있다며 수출 규제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실제로 2025년 초까지만 해도 미국 행정부 내부에서는 H20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수출 제한을 검토하고 있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4월 들어 분위기가 바뀌었다. NPR 등 미국 언론은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가 플로리다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만찬을 가진 뒤 H20 규제가 유예되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가 선회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젠슨 황 CEO는 미국 내 AI 데이터센터와 관련 인프라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고 이 제안이 규제 보류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엔비디아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이 결정은 트럼프 행정부가 유지하고 있는 광범위한 AI 반도체 수출 통제 정책과도 대비된다. 미국은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임기 말인 2025년 1월 새로운 AI 칩 수출 규칙을 도입했다. 이 규칙은 중국과 러시아뿐 아니라 미국 동맹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를 대상으로 반도체 성능 단계별 수출 제한을 적용하는 내용이다.
엔비디아는 이 규칙에 대해 글로벌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며 공개적으로 반대해왔다. 그럼에도 H20만 예외적으로 규제에서 빠질 가능성이 제기되자 정책의 일관성을 둘러싼 의문이 커졌다.
미국의 기본 목표는 AI 분야에서의 기술 우위를 유지하고 핵심 기술이 경쟁국으로 이전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20 수출 허용은 이 목표와 어긋나 보인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내 투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산업 기반 강화 역시 중요한 정책 목표로 내세워 왔다.
엔비디아가 약속한 데이터센터 투자는 고용과 세수 확대라는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이와 비슷한 흐름은 다른 글로벌 기술 기업들에서도 나타났다. 오픈AI는 소프트뱅크와 오라클과 함께 미국 내 초대형 데이터센터 구축 프로젝트를 발표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2025 회계연도에 AI 데이터센터에 8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절반은 미국에 투입될 예정이다. 미국 정부가 첨단 기술 기업들의 국내 투자를 사실상 정책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편 중국 내부의 반응은 복합적이다. 일부 중국 매체와 업계 관계자들은 H20이 여전히 미국의 통제 하에 있는 제품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보안 리스크를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중국 당국이 공식적으로 사용을 금지한 것은 아니지만 국유 기업과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신중한 접근이 이어지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는 수출 허용 여부와 별개로 실제 수요가 제한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반도체를 둘러싼 압박은 엔비디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의 TSMC에 대해서도 미국 내 공장을 짓지 않으면 최대 100%에 달하는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반도체 생산 능력을 미국으로 끌어들이려는 강경한 산업 정책 기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H20을 둘러싼 이번 결정은 미국의 AI 전략이 안보 논리와 경제 논리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수출 규제는 유지되지만 예외는 협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전달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이 같은 접근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기술 통제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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