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가 자신의 AI 기업 xAI가 경쟁사 오픈AI의 모델을 무단으로 학습에 활용했다고 법정에서 스스로 인정했다. AI 업계에서 공공연히 의심받아 온 관행이 처음으로 공개 확인된 순간이다.
머스크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연방법원 증인석에서 xAI가 오픈AI 모델을 대상으로 이른바 '디스틸레이션(distillation)' 기법을 사용해 자사 챗봇 그록(Grok)을 훈련시켰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디스틸레이션은 성능이 좋은 AI 모델에 대량의 질문을 던져 그 응답을 수집하고 이를 자체 모델 훈련 데이터로 활용하는 기법이다. 이에 머스크는 AI 업계에서 이는 일반적인 관행이라고 주장한 뒤 정말 그랬다는 의미냐는 재차 확인 질문에 "부분적으로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번 재판은 머스크가 오픈AI와 CEO 샘 올트먼, 공동창업자 그렉 브록먼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비롯됐다. 머스크는 오픈AI가 설립 당시 내걸었던 비영리 원칙을 저버리고 영리 법인으로 전환한 것이 계약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오픈AI 측은 이 소송이 자신들을 경쟁자로 여기는 머스크의 방해 시도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오픈AI 측 수석 변호사 윌리엄 세이빗은 개정 첫날 "머스크는 오픈AI에 대해 크게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지금은 경쟁자가 됐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격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머스크는 이틀간 약 5시간에 걸친 증언에서 오픈AI 비영리 재단에 최소 4400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 돈이 기업 가치 8000억 달러짜리 영리 스타트업을 만드는 데 쓰일 줄 알았다면 기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소송을 통해 머스크가 요구하는 것은 오픈AI의 비영리 구조 복원과 올트먼·브록먼의 이사회 퇴출, 그리고 약 1300억 달러의 손해배상이다.
증언 이틀째인 29일에는 법정 분위기가 격해졌다. 오픈AI 측 변호인이 단순한 예·아니오 답변을 요구하자 머스크는 "당신의 질문은 정의상 복잡하다. 단순하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라며 맞섰다.
재판장 이본 곤살레스 로저스는 재판 시작 전 머스크가 자신의 플랫폼 X에 올린 재판 관련 게시물을 문제 삼아 재발 시 발언 금지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증언 말미에 머스크는 AI 업계 순위에 대한 자신의 견해도 밝혔다. 그는 앤트로픽을 1위로 꼽고 오픈AI, 구글, 중국 오픈소스 모델 순이라고 평가했으며 xAI에 대해서는 직원 수백 명 규모의 훨씬 작은 회사라고 소개했다.
머스크의 시인은 AI 업계가 오랫동안 예민하게 여겨온 디스틸레이션 문제를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올렸다. 이 기법은 그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타사 모델에 적용할 경우 이용약관 위반에 해당한다. AI 기업들이 막대한 컴퓨팅 인프라와 인력에 투자해 쌓아올린 기술적 우위가 이 기법 하나로 상당 부분 무력화될 수 있어 업계의 경계심은 높다.
그동안 디스틸레이션 문제의 주역으로 지목된 건 주로 중국 기업들이었다. 앤트로픽은 지난 2월 23일 중국 AI 기업 딥시크(DeepSeek)·문샷AI(Moonshot AI)·미니맥스(MiniMax) 세 곳이 약 2만 4000개의 허위 계정을 이용해 클로드(Claude)와 총 1600만 건 이상의 대화를 생성하고 이를 자사 모델 훈련에 활용했다고 공개 고발했다.
이들은 에이전트 추론, 코딩, 컴퓨터 비전 등 클로드의 핵심 기능만을 집중적으로 겨냥했으며 계정이 차단되면 즉시 새 계정으로 교체하는 '하이드라 클러스터' 방식의 분산 네트워크를 운용했다. 앤트로픽은 IP 주소 분석과 요청 메타데이터를 통해 이 계정들을 특정 연구원 개인까지 추적했다고 밝혔다.
오픈AI 역시 같은 시기 미 하원에 제출한 메모에서 딥시크가 자사 모델을 포함한 미국 프론티어 AI 모델을 지속적으로 디스틸레이션 시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구글도 2025년 4분기부터 자사 제미나이(Gemini) 모델을 대상으로 한 디스틸레이션 시도가 급증했다고 밝혔다.
이에 오픈AI·앤트로픽·구글은 지난 4월 6일 세 기업이 2023년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창설한 비영리 AI 안전 협의체 '프론티어 모델 포럼(Frontier Model Forum)'을 통해 디스틸레이션 탐지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다. 한 기업이 특정 공격 패턴을 감지하면 이를 나머지 기업에 공유하는 사이버보안 업계의 위협 정보 공유 방식을 차용했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세 기업이 운영 차원에서 공동 대응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경쟁사 간 정보 공유가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어 법적 범위를 어디까지 허용할지가 과제로 남아 있다.
앤트로픽은 안전 장치 문제도 함께 제기했다. 디스틸레이션으로 복제된 모델에는 원본 모델의 안전 필터가 이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물무기 제조나 사이버 공격에 대한 거부 훈련, 유해 콘텐츠 방지 레이어가 빠진 채 확산될 경우 권위주의 정권의 사이버전·허위정보·대규모 감시에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머스크의 법정 인정은 중국 기업의 행위를 국가 안보 문제로 프레이밍하며 공동 대응에 나선 미국 기업들이 정작 서로에 대해 같은 기법을 써왔다는 사실이 당사자 입으로 확인해준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오픈AI는 이에 대한 논평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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