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1조2000억원을 들여 개발한 인공지능(AI) 교과서 사업이 시행 4개월 만에 사실상 중단됐다. 정부는 올해 3월부터 전국 학교에서 AI 교과서 사용을 의무화했지만 부정확한 내용과 개인정보 우려, 교사·학생의 업무 부담 등 문제가 잇따르면서 사용을 ‘선택 사항’으로 전환했다.
사업 초기 기대와 달리 현장은 혼란에 빠졌고 관련 업계와 정치권에서도 책임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AI 교과서는 교육 디지털화를 목표로 정부가 주요 출판사에 개발을 의뢰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참여 출판사들은 약 5억6700만달러(한화 5670억원)를 들여 온라인 기반의 AI 교과서를 제작했다. 학생 개개인의 학습 수준을 분석해 맞춤형 학습을 제공한다는 취지였지만 시행 직후부터 오류와 기술적 결함이 속출했다.
한 학생은 “기술 문제 때문에 수업이 자꾸 지연됐다. 집중하기 어렵고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AI가 제시한 학습 난이도 역시 학생 수준과 맞지 않아 교사들이 수업을 중단하고 전통 교재로 돌아가는 사례도 늘었다.
동아출판의 최고디지털책임자는 “학생들이 익숙한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면 더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며 “AI 교과서는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개인화된 지원을 제공한다”고 주장했지만 현장의 반응은 엇갈렸다.
학부모와 교원 단체는 AI 교과서가 오히려 학습 효율을 떨어뜨렸다고 지적했다. 한 교사는 “AI가 제시하는 피드백이 실제 학생의 사고 수준과 맞지 않아 지도에 혼선을 줬다”고 말했다.
문제는 개발 과정부터 드러났다. 국회 교육위원회 강경숙 의원은 지난 1월 회의에서 “기존 인쇄 교과서는 개발 18개월, 검토 9개월, 준비 6개월이 걸리는데 AI 교과서는 개발 12개월, 검토 3개월, 준비 3개월 만에 끝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재인데 너무 서둘렀다”고 비판했다.
교육부는 신속한 디지털 전환을 이유로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검증 절차가 부족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AI 교과서 사업은 정권 교체 과정에서 정치적 논란으로 번지기도 했다. 새 정부는 전임 정부가 추진한 정책의 연속성보다는 자체 개편에 무게를 두며 예산과 운영 방식을 재검토했다.
이에 따라 시행 4개월 만에 의무 사용 조항이 철회됐고 실제 사용 학교 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교육 현장에서는 예산 낭비라는 비판과 함께 “정치 논리에 교육이 휘둘린 사례”라는 비난이 동시에 제기됐다.
해외에서도 유사한 기술 교육 프로젝트가 실패한 전례가 있다. 2000년대 초 남아프리카공화국 하우텡주의 ‘온라인 스쿨 프로젝트’는 학교에 컴퓨터와 인터넷을 보급했지만 2013년 예산 낭비 논란 속에 폐기됐다.
당시 소요된 비용은 약 10억랜드(5700만달러)에 달했다. 말레이시아의 ‘1베스타리넷(1BestariNet)’도 클라우드 기반 학습 플랫폼으로 8년간 운영됐으나 인터넷 속도 불일치와 비효율 문제로 2019년 종료됐다. 전체 비용은 수십억 링깃(1링깃 약 235원)에 달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사업 속도와 비용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단 4개월 만에 사실상 무산된 데다 총 사업비 1조2000억원은 해외 사례를 훨씬 웃돌았다. 한 교육정책 전문가는 충분한 검증과 시범 운영 없이 전국 시행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실패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AI 교과서 사업의 부진은 기술적 문제를 넘어 사회적 불신으로 번지고 있다. 일부 학부모는 자녀의 학습 데이터가 민간 기업 서버에 저장된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했다.
교육부는 보안 조치를 강화했다고 설명했지만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민감한 아동 데이터의 제3자 처리 절차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일부 학교는 자체적으로 AI 기능을 비활성화하거나 오프라인 버전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학생들의 피로감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 중학생은 “AI 교과서가 자꾸 오류를 내서 수업 시간이 늘어났다. 결국 숙제도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반복되는 기술 점검과 버그 수정 요청에 수업 준비 시간을 잃었다고 호소했다. 실제로 일부 학교에서는 수업 시간의 20% 이상이 시스템 오류 해결에 쓰였다는 보고도 나왔다.
교육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디지털 교과서’의 본질적 필요성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AI가 학습 효율을 높인다는 근거가 충분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매사추세츠공과대(MIT)가 올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인공지능을 활용한 교육 환경에서 학습자의 장기적 뇌 활동이 저하되는 경향이 관찰됐다. 연구진은 AI 보조 학습이 단기 성취도에는 효과를 보일 수 있지만 장기 학습 능력에는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편 정부는 남은 예산을 디지털 인프라 개선과 교사 연수 확대에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AI 교과서의 완전 폐기는 아니고 보완을 위한 재설계 과정”이라며 “기술적 안정성을 확보한 후 다시 도입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선 학교에서는 재도입에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한 교사는 “현장에 남은 피로감이 너무 크다. 학생과 교사 모두 AI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사례가 향후 다른 국가의 AI 교육 도입에도 경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교육 기술의 진화가 불가피하더라도 속도보다 완성도가 우선돼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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