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미국 인텔과 손잡고 현지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협상이 성사되면 한국 반도체 기업이 미국 땅에서 웨이퍼 단계부터 메모리를 만드는 첫 사례가 된다.
웨이퍼는 반도체를 새겨 넣는 원판으로 이 단계부터 미국에서 생산한다는 것은 사실상 반도체 제조의 핵심 공정 전체를 현지로 옮긴다는 의미다.
로이터통신은 16일(현지시간) 논의에 정통한 관계자 3명을 인용해 두 회사가 미국 내 메모리 생산을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현재 유력하게 거론되는 방안은 인텔이 오하이오주에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의 일부 공간을 SK하이닉스가 빌려 메모리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인텔과 SK하이닉스, 그리고 안정적인 메모리 확보를 원하는 주요 클라우드 기업이 함께 합작법인을 세우는 방안도 검토 대상에 올라 있다. 다만 논의는 초기 단계로 투자 방식이나 오하이오에서 생산할 메모리 종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SK하이닉스는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회사는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추가 생산기지 건설을 포함한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확정된 사안은 없다고 밝혔다. 보도에 언급된 두 시나리오를 포함해 특정 기업과의 협력이나 미국 내 생산과 관련해 결정된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인텔 역시 해당 보도를 추측이라며 논평을 거부했으나 오하이오 공장에 대한 투자는 계속 진행하고 있다고만 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미국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다.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40억달러 이상을 투입해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HBM은 여러 개의 메모리를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를 크게 끌어올린 제품으로 AI 연산에 필수적인 부품이다.
다만 인디애나 공장은 한국 등에서 만든 D램을 들여와 이를 쌓고 포장하는 후공정 시설이다. 반면 이번에 인텔과 논의하는 방안은 웨이퍼 자체를 미국에서 깎아 만드는 전공정까지 포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인디애나 공장은 2029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 논의의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압박이 있다. 백악관은 올해 1월 반도체 수입품에 광범위한 관세를 매길 수 있다면서도 미국 내 생산에 투자하는 기업에는 관세를 깎아주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미국에서 생산하지 않으면 높은 관세를 물게 될 것이라며 현지 양산을 노골적으로 요구해 왔다.
AI 투자가 폭증하면서 메모리 품귀 현상이 심해지자 미국 정부는 반도체 기업들을 상대로 자국 내 생산 확대를 밀어붙이고 있다. SK하이닉스로선 관세 위험을 차단하고 미국 내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커진 셈이다.
SK그룹의 의지도 확인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7월 여건이 된다면 국내 호남 지역 공장과 함께 미국에도 공장을 지어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같은 달 SK하이닉스는 미국주식예탁증서(ADR)를 나스닥에 상장하며 미국 투자자 접근성을 넓혔다. 다만 지난 7월 회사는 인텔 오하이오 부지와 공장을 인수할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두 회사는 이미 거래 경험이 있다. 2020년 인텔은 낸드플래시 사업부를 90억달러에 SK하이닉스에 매각했다.
넘어야 할 산은 미국이 아니라 국내에 있다. 첨단 메모리 기술의 해외 생산은 기술 유출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어떤 결정이든 기업의 재량이라면서도 해당 기술이 국가 핵심 기술에 해당하면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른 검토 대상이 된다고 밝혔다.
국가 핵심 기술은 해외로 넘어갈 경우 국가 안보나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어 정부가 이전을 통제하는 기술을 뜻한다. HBM이나 D램 같은 첨단 메모리가 여기에 포함될 수 있어 실제 계약이 추진되더라도 정부 심사라는 관문을 거쳐야 한다.
한편 이번 보도가 나온 뒤 두 회사 주가는 나란히 올랐다. 인텔 주가는 장중 4%가량 뛰었고, SK하이닉스의 미국 상장 주식도 3% 넘게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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