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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폭등에 영국 국채 또 흔들…2022년 트러스 악몽 재현되나

  • 임지민 기자
  • 입력 2026.03.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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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가격 급등이 영국 국채 시장을 강타했다. 영국 국채인 길트(gilt)는 이달 들어 2022년 리즈 트러스 전 총리 재임 당시 이후 최악의 월간 성과를 기록 중이다.

 

이번 충격의 진원지는 호르무즈 해협이다. 이란-이스라엘·미국 간 분쟁이 격화되면서 페르시아만을 오가는 원유 수출의 핵심 통로인 이 해협의 통행량이 급감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3월 중순 기준으로 하루 약 2000만 배럴의 원유 공급이 영향을 받았으며 걸프 산유국의 실제 생산량도 하루 최소 1000만 배럴가량 줄었다고 추산했다. 


에너지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자 인플레이션 우려가 다시 불붙었다. 물가가 오르면 중앙은행이 금리를 더 오래, 더 높게 유지할 가능성이 커지고 이는 이미 발행된 국채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투자자들이 길트를 대거 매도하면서 영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5%를 넘어섰다. 국채 금리는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금리 상승은 채권 가격 하락을 의미한다. 5%대는 2022년 트러스 정부의 '미니 예산안' 쇼크 이후 처음이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이다. 분쟁 직전 4.3%였던 금리가 한 달도 안 돼 80bp(1bp=0.01%포인트) 이상 뛰었다.

 

특히 2년물 길트 금리 상승폭은 유럽이나 미국의 동일 만기 국채보다 훨씬 컸다.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같은 기간 48bp, 독일 국채는 42bp 오르는 데 그쳤지만 영국은 이를 훨씬 웃도는 상승폭을 보였다. G7 국가 가운데 영국의 국채 금리 상승이 가장 가팔랐다.

 

영국이 유독 더 큰 충격을 받은 이유는 영국 경제의 고질적인 취약점 때문이다. 영국은 일본을 제외한 G7 국가 중 천연가스 수입 의존도가 가장 높아 에너지 가격 변동에 직접적으로 노출된다. 영란은행의 현재 기준금리 3.75%는 G7 중 최고 수준인데, 분쟁 발생 전까지만 해도 시장은 이달 금리 인하를 75% 이상의 확률로 점쳤다. 

 

이러한 인하 기대가 하이킹 우려로 급반전하면서 길트 시장의 충격이 그만큼 증폭됐다. 골드만삭스는 에너지 가격이 내리지 않으면 영란은행이 4월 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시장에서는 현재 연내 최대 1%포인트 금리 인상을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 헤지펀드의 급격한 포지션 청산이 변동성을 키웠다. 연초 헤지펀드들은 영국 경기 둔화와 금리 인하를 예상해 차입금을 동원해 길트를 대거 사들이는 전략을 펼쳤다. 

 

그러나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자 이 베팅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매도 물량이 쏟아졌다. 차입으로 투자 규모를 키운 만큼 퇴출 속도도 빨랐고 이것이 길트 가격 하락을 더욱 가속화했다.

 

영란은행은 지난주 통화정책위원회에서 9명 전원 찬성으로 기준금리를 3.75%로 동결했다. 그러나 만장일치라는 결정 자체가 시장에 신호로 읽혔다. 금리 인하를 기대했던 투자자들이 기대를 접으면서 길트를 내다 팔았고 이것이 이번 급락의 도화선이 됐다. 

 

영란은행 총재 앤드루 베일리는 에너지 가격 급등에 대응해 금리 인상에 나설 가능성에 대해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에너지 가격이 현 수준을 유지하면 4월 회의에서 금리 인상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시장에 확산되고 있다.

 

재정 지표도 악재다. 영국 통계청(ONS)에 따르면 2월 공공부문 차입액은 143억 파운드로, 시장 전망치 93억 파운드를 크게 웃돌았다. 공공부문 차입이란 정부 수입이 지출에 못 미쳐 부족분을 국채 발행 등으로 메우는 것을 말한다. 길트 금리 급등으로 영국 정부의 부채 이자 부담도 덩달아 커졌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분쟁 발발 후 길트 금리 상승만으로 재무장관 레이철 리브스의 재정 완충 여력 45억 파운드가 사라졌다고 추산했다. 6월 말 가스·전기 요금 상한제가 만료되면 가정 에너지 요금이 최대 20%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부가 지원 대책을 내놓을 경우 추가 국채 발행이 불가피해 시장에 또 다른 압박 요인이 될 수 있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리브스 재무장관, 베일리 영란은행 총재와 함께 긴급 코브라 회의를 소집해 에너지 안보와 인플레이션, 경기 영향을 점검했다. 실물 경제에도 충격이 나타나고 있다. 

 

분쟁 발발 이후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4펜스(약 10%) 올랐고 경유는 29펜스(약 20%) 뛰었다. 농가들은 농기계용 연료와 비료 비용이 크게 늘었다고 호소하고 있다. 국채 금리 급등이 주택담보대출 금리에도 연쇄적으로 반영되면서 네이션와이드, 버진머니, 내트웨스트 등 주요 은행들이 일제히 모기지 금리를 올렸다.

 

2022년 트러스 사태와의 비교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재원 조달 방안 없이 450억 파운드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했고 시장이 즉각 반응하면서 연기금 펀드의 연쇄 청산 위기로 이어져 영란은행이 긴급 개입해야 했다. 

 

이 때문에 트러스는 취임 49일 만에 물러났다. 이번 사태의 원인은 정책의 잘못이 아닌 외부 에너지 충격이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국채 금리가 짧은 기간에 급등하고 재정 여력이 빠르게 소진된다는 점에서 시장의 기억을 자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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