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제재 대상에 오른 이른바 '다크 플릿(dark fleet)' 유조선의 매각을 허용해 합법적인 원유 수송에 투입하기로 했다. 호르무즈 해협 위기로 사상 최고치까지 치솟은 해상 운임을 끌어내리기 위한 조치다.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19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린 시타델증권 행사에서 제재 유조선을 사들여 수리한 뒤 합법적으로 운항하겠다는 투자자들의 제안이 잇따르고 있으며 정부가 이들과 협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크 플릿은 미국 등 서방의 제재를 피해 이란·러시아·베네수엘라산 원유와 석유제품을 실어 나르는 선박을 말한다. 소유 구조를 숨기거나 위치 신호를 끈 채 운항하는 경우가 많아 '그림자 선단'으로도 불린다.
라이트 장관은 이들 선박 일부를 '나쁜 선단'에서 '좋은 선단'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매각된 선박은 앞으로 제재 대상 원유를 싣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그는 전 세계 다크 플릿을 약 1600척으로 추산했고 이 가운데 수십 척에서 많게는 수백 척이 합법 선단으로 넘어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이란이나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제재를 푸는 것은 아니며 선박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선박마다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고 운임 인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효과는 의미 있는 수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승인은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이 사안별로 검토하는 방식이 될 전망이다. OFAC는 제재 대상 개인·기업·선박을 '특별지정제재대상(SDN)' 명단으로 관리하며 명단에 오른 선박과 거래하면 미국 금융망 이용이 막힐 수 있다.
OFAC는 이달 8일 이란 그림자 선단 소속이던 유조선 '하쿠나 마타타'와 '피노키오'가 제재 대상이 아닌 운영사에 팔렸다는 이유로 두 척을 명단에서 삭제했다.
배경에는 기록적인 운임이 있다.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제한되자 중동 산유국들은 소형 선박으로 원유를 해협 밖 오만만으로 옮긴 뒤 바다 위에서 대형 유조선에 옮겨 싣는 '선박 간 환적(STS)' 방식으로 수출하고 있다.
대형 유조선이 해협 밖에서 화물을 기다리며 오래 묶이면서 다른 항로에 투입할 배가 부족해졌다. 해운 조사업체 포텐에 따르면 원유 200만 배럴을 싣는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의 하루 용선료는 이달 초 130만 달러로 1월 초 3만 달러의 약 43배에 달했다.
미국 멕시코만에서 아시아로 가는 VLCC 한 척을 한 차례 빌리는 비용은 7700만~8000만 달러까지 올랐다. 지난해에는 1000만 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걸프에서 아시아로 가는 원유 운임이 배럴당 약 36달러로 전쟁 전의 5배를 넘는다고 집계했다. 중동 원유를 홍해를 거쳐 아시아로 보내는 운임도 지난주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운임은 최근 정점에서 다소 내려왔다. 발틱해운거래소의 오만만~중국 VLCC 운임지수는 이달 둘째 주 841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지난주 776으로 떨어졌다. 이 지수는 항로별 기준 운임 대비 비율로 운임 수준을 나타내는 '월드스케일' 방식이다.
19일 오만~중국 VLCC의 하루 수익은 79만181달러로 이달 초 고점보다 13% 낮았고 미국 멕시코만~중국 항로는 51만4869달러로 19% 하락했다. 시장에서는 중동 해역 선박 공격 이후 수요가 둔화한 데다 미국이 그림자 선단 제재 완화를 검토한다는 보도가 14일 처음 나오면서 운임이 밀렸다고 본다.
금융시장도 즉각 반응했다. 미래 운임에 베팅하는 선물 계약인 운임선도계약(FFA) 가격이 급락했다. 유조선 운임 선물을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 BWET는 15일 하루 9% 떨어지는 등 한 주 동안 약 10% 내렸다.
중국원양해운에너지와 중국초상에너지해운 등 아시아 유조선주가 일제히 급락했고 미국 DHT홀딩스 주가도 한 주간 4.2% 하락했다. 19일 브렌트유는 0.48% 내린 배럴당 109.3달러,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0.61% 내린 98.42달러에 마감했다.
실제 효과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선박 분석업체 케이플러는 이번 조치가 현재 유조선 위기에 사실상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평가했다.
미국 제재를 받는 VLCC는 약 160척으로 전체 상선 VLCC의 22%에 이르지만 선령이 높은 배와 이란 국영유조선회사(NITC) 소유 선박을 걸러내면 시장에 복귀할 수 있는 배는 24척 안팎이라는 계산이다.
애로리서치는 전 선형을 통틀어 최대 22척으로 추산했고 이 중 VLCC가 14척이다. 선박 중개업체 BRS는 미국이 단독으로 제재한 원양 유조선을 148척으로 전 세계 원양 유조선의 2.5%로 집계했다.
걸림돌도 남아 있다. 유럽연합(EU)과 영국의 제재는 그대로 유지되고 주요 해운 보험사는 EU·영국 규정을 따라야 한다. 그림자 선단 선박 상당수는 독립 검사기관이 선박의 기술·안전·환경 기준 충족 여부를 확인해 발급하는 '선급 증서'도 갖추지 못했다.
업계에선 제재 선박을 넘겨받거나 팔기 위한 허가를 받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린다고 본다. 에너지 애스펙츠는 러시아·베네수엘라 관련 제재 유조선 대부분이 최근 석 달 동안 이미 운항해 왔다는 점을 들어 새로 늘어나는 선복이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그림자 선단 선주들이 막대한 차익을 거둘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림자 선단에 흔한 선령 15년짜리 수에즈막스급(약 100만 배럴 적재) 유조선의 중고 가격은 최근 1억 달러로 2021년의 4배 수준이다.
에너지부는 이번 조치가 러시아의 원유·석유제품 수출을 돕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이달 9일 러시아산 디젤 거래를 2027년 4월 7일까지 허용하는 일반 허가를 내줬고 라이트 장관은 이날 행사에서 이 결정도 옹호했다. 다음 달 3일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는 에너지 가격 안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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