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약 3조엔 규모의 보정예산을 편성한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25일 기자회견을 열고 연료비 보조와 생활비 부담 완화에 쓰일 재원을 추가로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보정예산은 본예산이 통과된 뒤 회계연도 중간에 추가로 짜는 예산을 말한다.
다카이치 총리는 그동안 추가 지출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란 전쟁 장기화로 국제유가가 급등하고 엔화 약세까지 겹치면서 수입물가가 치솟자 입장을 바꿨다.
지난 3월부터 정유사 등에 휘발유 가격 안정을 위한 보조금을 지급해 왔는데 그 재원이 다음 달이면 바닥날 것으로 예상된다. 본예산에 편성됐던 1조엔 규모의 예비비 가운데 절반은 이미 여름철 전기·가스요금 보조에 쓰기로 결정된 상태다. 중동 위기가 길어질 가능성에 대비해 예비비를 다시 채워둘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시장의 관심은 재원 조달 방식에 쏠렸다. 다카이치 총리는 적자국채를 새로 발행해 보정예산을 충당하겠다고 밝혔다. 적자국채란 세금 등 정상 수입으로 메우지 못하는 부족분을 빌려서 채우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이다.
다만 시장에 풀리는 국채의 총량은 당초 계획에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수가 예상보다 잘 걷히고 비세수 수입이 늘었으며 집행되지 않을 예산이 생긴 덕분에 6월까지 발행 예정이던 3조엔가량의 적자국채를 발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절약한 발행 한도를 보정예산 재원으로 돌려쓰면 시장에서 소화해야 할 국채 물량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논리다. 다카이치 총리는 시장 상황과 경제지표를 지켜보면서 국내총생산 대비 부채비율을 꾸준히 낮춰 재정 건전성과 시장 신뢰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런 입장 표명은 채권시장의 동요를 가라앉히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정부가 보정예산 재원으로 신규 국채를 발행할 것이라는 로이터 보도가 나온 뒤 지난주 10년 만기 일본 국채 금리는 한때 2.8%까지 올랐다. 1996년 10월 이후 약 29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30년물 금리도 사상 처음 4%를 돌파해 4.205%까지 치솟았다. 채권 금리가 오른다는 것은 정부가 돈을 빌릴 때 부담해야 할 이자가 비싸진다는 의미다. 일본은 국내총생산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230%를 넘어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은데 금리 상승은 곧바로 이자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
올해 본예산만 봐도 부담은 이미 무겁다. 122조3000억엔 규모의 2026회계연도 본예산에서 이자 지급과 국채 상환에 들어가는 채무상환비는 31조3000억엔으로 1년 전보다 10.8% 늘었다. 가정 금리는 3.0%로 잡혔는데 이는 29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장기금리가 이 수준을 계속 웃돌면 정부는 또다시 추가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재정 부담 요인은 보정예산만이 아니다. 다카이치 총리는 식료품에 붙는 8% 소비세를 한시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정책이 시행되면 세수가 연간 최대 5조엔 줄어들 것으로 추산된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 2월 총선에서 식료품 소비세 폐지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고 자민당이 중의원 3분의 2 의석을 확보한 압승의 동력이 됐다. 다만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는 최근 이 정책을 두고 대상이 불분명하고 비용이 크다며 오히려 세율을 점진적으로 올려야 한다고 권고했다.
다카이치 내각의 지지율은 5월 지지통신 조사에서 59.4%를 기록했다. 지난해 10월 취임 이후 줄곧 60% 안팎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휘발유 보조금이 곧 한도에 다다르고 여름철 냉방 수요로 전기·가스요금 부담이 커지는 시점에서 정부가 물가를 얼마나 잡아낼 수 있을지가 지지율 향방을 가를 변수로 꼽힌다.
(썸네일 사진 출처: Walter H. Shorenstein Asia-Pacific Research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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