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미디어 산업 최대 인수전으로 불리는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WBD)를 둘러싼 싸움이 이제 워싱턴 정치의 영역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넷플릭스와 파라마운트가 각각 다른 방식의 인수안을 들고 나왔고, 이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가까운 정치 인사들이 양쪽 진영에 나뉘어 합류하면서 인수 성패의 기준이 “얼마를 쓰느냐”보다 “누가 규제를 통과하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넷플릭스는 워너의 영화 스튜디오와 HBO Max 등 핵심 자산만 분리해 사들이는 방안을 추진 중이고 파라마운트는 회사를 통째로 현금으로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은 상태다. 금액만 놓고 보면 파라마운트가 약 780억달러 수준의 올캐시 인수안을 제시해 더 커 보이지만 시장의 시선은 숫자보다 규제 통과 가능성에 쏠려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반독점 심사’다. 반독점은 특정 기업이 너무 커져서 시장 경쟁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지를 정부가 따지는 절차다. 미국에서는 법무부가 이 역할을 맡는다. 만약 인수가 승인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조건의 계약도 무용지물이 된다.
넷플릭스와 파라마운트가 정치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넷플릭스는 공화당 전략가와 전 백악관 참모들을 대거 영입해 워싱턴 대응팀을 강화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핵심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규제 당국과 의회를 상대로 “이 인수는 경쟁을 해치지 않는다”는 논리를 설득하는 데 나선 것이다.
넷플릭스가 이런 준비에 공을 들이는 배경에는 스트리밍 시장에서 이미 거대 사업자인 만큼 반독점 문제에 가장 먼저 걸릴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깔려 있다.
반면 파라마운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승부를 건다. 트럼프 캠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커뮤니케이션 책임자와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법무부 반독점 책임자를 핵심 자문으로 앉혔다. 이들은 규제의 논리와 절차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들이다.
파라마운트의 전략은 “회사를 통째로 인수해도 시장 경쟁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부의 심사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올캐시 인수라는 점을 내세워 자금 조달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 역시 이 싸움에서 방관자가 아니다. 회사 측은 공화당 진영의 선거 전략가와 여론조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어느 쪽 제안이 정치적으로 덜 위험한지 계산하고 있다. 이사회는 공개적으로 파라마운트 제안의 자금 조달 확약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한 차례 거절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파라마운트는 충분한 자금 지원 라인이 확보돼 있다고 반박했다. 이 공방은 어느 쪽 제안이 실제로 정부 문턱을 넘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인수전이 특별한 이유는 트럼프 인맥이 한쪽으로 뭉치지 않고 양쪽에 갈라져 있다는 점이다. 같은 정치적 배경을 가진 인사들이 서로 다른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며 충돌하는 장면은 미국 미디어 업계에서도 이례적이다. 이는 현재 미국의 미디어 인수 환경이 얼마나 정치화됐는지를 보여준다.
과거에는 시장 점유율과 가격 경쟁력이 심사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정치적 분위기와 규제 철학이 결과를 좌우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싸움이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반독점 심사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 걸릴 수 있고 그 사이 정치 일정과 여론도 변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로비와 법률 대응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다.
이번 워너브라더스 인수전은 미국 미디어 산업의 미래뿐 아니라 대형 기업 인수가 어떤 정치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돈은 기본 조건이 됐고 이제 승부를 가르는 변수는 워싱턴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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