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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빼는 주사 한 방에 술잔이 비었다...주류업계는 지금 ‘재고 폭탄’

  • 임지민 기자
  • 입력 2026.01.2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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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이래 술은 항상 기호식품 순위에서 맨 앞자리를 놓치지 않았지만 이제는 프리미엄 위스키와 코냑, 테킬라 시장이 빠르게 식으면서 글로벌 주류업계가 매출보다 재고 걱정을 먼저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주요 상장 주류기업의 재무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디아지오와 페르노리카, 캄파리, 브라운포맨, 레미코앵트로 등 5개 기업의 ‘숙성 중 증류주 재고’ 규모는 약 220억 달러, 한화로 32조 원 수준까지 불어났다. 최근 10여 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이 재고는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원액을 말하는 것으로, 몇 년 뒤 팔릴 미래 매출이자 동시에 현재 기업의 자금을 묶어두는 비용이다. 주류 산업에서 숙성 재고는 일반 제조업 재고와 성격이 다르다. 위스키나 코냑은 수년간 숙성해야 하므로 오늘 생산량을 줄인다고 해서 내일 공급이 바로 줄지 않는다. 

 

이미 만들어 둔 원액은 시간이 지나야 시장에 나올 수 있고 보관 기간 동안 금융비용과 보험료, 관리비가 계속 발생한다. 수요가 꺾이면 기업은 가격을 지켜 브랜드 가치를 유지할지, 물량을 줄이기 위해 할인과 프로모션을 늘릴지 선택을 강요받는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흔들리는 것은 매출보다 현금흐름이다. 재고가 늘수록 운전자본이 묶이고 잉여현금흐름은 악화된다.


이번 둔화의 배경은 세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경기와 물가 압박이다. 고금리와 높은 생활비로 가처분소득이 줄면서 소비자들은 가장 먼저 고가 소비를 줄였다. 프리미엄 주류는 일상재가 아니라 선택재 성격이 강해 소득 변화에 민감하다. 

 

둘째는 팬데믹 시기의 수요 착시다. 코로나19 기간 동안 집에서 술을 즐기는 문화가 확산되며 프리미엄 주류 수요가 급증했고, 기업과 유통채널은 이 흐름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생산과 발주를 늘렸다. 

 

그러나 팬데믹이 끝난 뒤 소비는 정상화됐고 도매상과 소매상이 먼저 재고를 줄이기 시작하면서 제조사에는 주문 감소가 늦게 전달됐다. 이른바 재고 조정 과정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셋째 변수는 체중감량 치료제 확산이다. 위고비와 오젬픽, 마운자로로 대표되는 GLP-1 계열 약물은 식욕을 억제하는 기전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에는 음주 욕구 감소와도 연관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미국 의학저널에 실린 소규모 무작위 임상시험에서는 세마글루타이드를 투여받은 성인에서 알코올 갈망이 낮아지고 일부 음주 지표가 감소했다. 아직 표본 규모는 작지만, 가능성을 임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소비 데이터에서도 변화는 관측된다. 

 

미국 시장조사기관의 구매 데이터에 따르면 GLP-1 치료를 시작한 이후 알코올 카테고리 지출이 줄고 무알코올 맥주와 와인 구매는 늘어나는 흐름이 나타났다.


다만 업계는 이 변수를 아직 ‘결정적 요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디아지오는 투자자 대상 자료에서 GLP-1과 대마 합법화 같은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언급하면서도 현재로서는 실적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압박의 본질을 생활양식 변화보다는 경기와 물가에 따른 순환적 요인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다. 이를 영구적인 구조 변화로 인정하는 순간 장기 성장률 가정이 낮아지고 기업 가치 평가에 직접적인 타격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고는 해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재고가 늘어나면 손익계산서보다 먼저 현금흐름표에 영향을 준다. 실제로 여러 기업의 실적 발표에서는 매출보다 재고와 운전자본 언급이 늘고 있다. 

 

페르노리카드는 최근 실적에서 유통채널 재고 조정이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고 브라운포맨 역시 미국 내 도매상 재고 변화가 분기 실적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레미코앵트로는 미국 시장 회복으로 매출이 예상치를 웃돌았다고 밝혔지만, 동시에 가격 정책을 유연하게 가져갈 가능성도 열어뒀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현재 상황의 핵심 질문은 지금의 둔화가 일시적인 경기 사이클 때문인지, 아니면 음주 빈도와 소비 방식이 바뀌는 대전환의 초입인지다. 이를 가르는 기준은 관측 가능한 지표다. 

 

재고 대비 매출 비율이 계속 상승하는지, 할인과 프로모션이 상시화되는지, 무알코올 제품이 기존 주류 소비를 실제로 대체하는지, GLP-1 보급률 증가와 주류 구매 빈도가 함께 움직이는지, 그리고 기업들이 숙성 원액 투자와 설비 투자를 줄이기 시작하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주류 관련주 주가가 먼저 흔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구적인 문화의 변화가 확정되기 전에 재고가 손익과 현금흐름을 압박하는 순간 시장은 가장 빠르게 반응한다. 이 조합이 단기 조정으로 끝날지, 장기적인 판도 변화를 예고하는지는 앞으로 재고 숫자가 말해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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