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약·바이오 산업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약가 정책 이슈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약값을 지불하는 구조를 바꾸겠다며 이른바 ‘최혜국 약가 정책(Most Favored Nation Rule)’을 재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정책은 메디케어가 적용하는 일부 의약품 가격을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가격 수준에 맞추겠다는 구상이다. 트럼프는 해당 조치를 행정명령 형태로 추진하겠다고 예고하며 시행 시 약값이 단기간에 큰 폭으로 낮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는 발표 단계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행정명령의 구체적 문구, 법적 정당성, 제약업계의 반발과 소송 가능성 등을 모두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이 크다.
미국의 약값이 높은 이유는 국제적인 비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과 유럽 주요국, 캐나다와 비교하면 동일한 약이 두세 배 이상 비싸게 판매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 현상은 제도에서 비롯됐다. 우선 미국의 노인 대상 공공보험인 메디케어는 오랫동안 제약사와 직접 가격 협상을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한돼 왔다.
2003년 제정된 메디케어 현대화법은 정부의 직접 개입을 금지하고 민간 보험사와 중개기관이 협상을 맡도록 설계했다. 이로 인해 정부가 가장 큰 구매자임에도 가격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는 구조가 고착됐다.
여기에 약값 중개 역할을 하는 PBM이라는 존재가 더해졌다. PBM은 보험사와 제약사 사이에서 약값을 협상하고 리베이트를 받는 구조인데 이 과정에서 제약사는 명목 가격을 높이고 PBM은 할인 폭을 키워 리베이트를 확대하는 방식이 굳어졌다.
외형상으로는 할인 경쟁처럼 보이지만 실제 소비자가 부담하는 약가는 오히려 올라가는 결과를 낳았다. 신약과 바이오의약품의 장기 특허 보호도 경쟁을 제한하는 요인이다. 특히 바이오의약품은 복제가 어려워 바이오시밀러 출시가 늦어지고 이 기간 동안 사실상 독점이 유지된다.
트럼프 행정부 1기에서도 이러한 구조를 흔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2020년 추진된 최혜국 약가 정책은 메디케어 파트 B 약값을 국제 최저가 수준에 연동시키려 했으나 공청회 등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행정절차법 위반 판결을 받으며 중단됐다.
PBM 리베이트를 환자에게 직접 돌려주려는 정책도 보험료 인상 우려로 무산됐다. 이후 바이든 행정부는 의회를 통한 제도 개편을 선택했고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정부가 메디케어 약값을 직접 협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적용 시점이 늦고 대상이 단계적으로 확대되는 구조여서 단기간에 체감 효과를 내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가 다시 최혜국 약가를 꺼내든 배경에는 다른 접근이 거론된다. 이번에는 약값 문제를 국가안보 문제로 묶는 전략이다.
미국이 사용하는 의약품 원료의 상당 부분이 해외에서 생산되고 특히 중국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미국 식품의약국에 따르면 주요 의약품 원료의 상당 비율이 해외에서 생산되며 항생제와 진통제, 항암제의 핵심 성분도 중국과 인도를 거쳐 공급된다.
코로나19 이후 중국산 의약품 수입 규모는 빠르게 늘었고 인도 역시 원료의 상당 부분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만약 공급이 차단될 경우 병원 현장의 의약품 부족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 때문에 향후 정책 논의는 고가 신약보다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필수 의약품과 복제약을 중심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페니실린 계열 항생제나 해열진통제처럼 중국 원료 의존도가 높은 품목을 미국 내에서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이 정책 논의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과거 사례에서 보듯 제약업계는 강력한 로비력을 갖고 있어 급격한 변화는 쉽지 않지만 약값과 공급망 문제를 동시에 건드리는 시도는 정치적으로 반복 등장해 왔다.
따라서 이번 약가 논쟁은 미국 의료 시스템과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점차 확장되는 모양새다. 그 때문에 실제 정책의 형태와 파급력은 과거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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