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 시장을 뒤흔든 정책 하나가 있다.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은 2025년 7월 31일 유권해석을 통해 스위스산 1kg 및 100온스 주조 금괴에 적용되는 관세 분류 코드를 7108.13.5500으로 명시했다. 이 코드에는 최대 39%의 관세가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 시장에 알려졌다.
금은 통상 대부분의 국가에서 무관세로 거래되어 왔기 때문에 해당 해석은 실물 금 수입에 고율 관세가 부과될 수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스위스는 전 세계 금 정제와 주조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국가로 미국으로 유입되는 금 실물의 핵심 공급처다.
이 해석이 공개된 직후 뉴욕으로 향하던 실물 금 수송 흐름이 급격히 위축됐고 일부 항공 운송편이 중단됐다. 실물 공급 차질 우려가 확산되면서 뉴욕 금 선물 가격은 급등했고 시장은 미국 금 시장이 단기간 고립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금 선물 가격은 8월 8일 장중 온스당 3534.10달러까지 치솟으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같은 시기 금 ETF에는 단기간에 수십 톤 규모의 자금이 유입됐다. 실물 금을 기초로 하는 ETF 구조상 자금 유입은 대부분의 경우 실물 매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공급 압박이 더욱 커졌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8월 11일 금에는 관세가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면서 급한 불은 진정됐지만 시장의 인식은 이미 바뀐 상태였다. 글로벌 금 유통이 단 한 줄의 행정 해석으로 멈칫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금은 본격적으로 정책 리스크에 직접 노출된 전략 자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금 가격을 지탱한 또 다른 축은 금리 환경 변화였다. 시장은 2025년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 인하가 단행될 가능성을 매우 높은 확률로 반영하고 있었다.
기준금리가 하락하면 금을 보유하는 데 따른 기회비용이 줄어든다. 금은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자산이기 때문에 미래에 금을 매도해 얻을 수 있는 가치를 현재로 환산할 때 적용되는 할인율에 민감하다. 이 할인율 역할을 하는 것이 실질금리다.
실질금리는 명목금리에서 기대 인플레이션을 뺀 값으로 미국에서는 10년 만기 물가연동국채(TIPS) 수익률이 대표 지표로 활용된다.
2025년 4월 이후 10년 TIPS 수익률은 하락 흐름을 이어갔고 이는 무이자 자산인 금의 현재 가치 상승으로 이어졌다. 고용 지표 둔화와 경기 지표 약화가 겹치면서 금리 인하 기대가 강화되고 금 가격에 우호적인 환경이 형성됐다.
중앙은행의 금 매수도 시장 구조를 바꾸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국 인민은행(PBOC)은 2024년 11월부터 2025년 7월까지 9개월 연속 금을 순매수했다. 단일 국가 중앙은행이 이처럼 장기간 연속 매수에 나선 사례는 드물다. 이는 단기 투자 목적이 아니라 전략적 비축 성격으로 해석된다.
중국은 미중 갈등 이후 달러 자산 의존도를 줄이고 금을 대체 안전자산으로 확대하는 방향을 공개적으로 유지해 왔다. 금은 제재로 동결하기 어렵고 국제 결제망과 분리된 자산이기 때문에 외환보유 전략상 유리한 수단으로 평가된다.
동시에 금 보유 확대는 위안화 신뢰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중앙은행 수요는 가격 민감도가 낮아 금값 하방을 안정적으로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금 ETF와 선물 시장의 움직임도 가격 변동성을 키웠다. 2025년 7월부터 8월 초까지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금 ETF에 약 70~80톤 규모의 순유입이 발생했다. 이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이후 최대 수준이다.
같은 시기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포지션 데이터에서는 상품거래자문사와 매크로 펀드를 중심으로 금 선물 순매수 포지션이 급격히 확대됐다. 거시 지표를 기반으로 거래하는 이들 자금은 관세 이슈와 금리 인하 기대, 실질금리 하락을 동시에 반영하며 공격적으로 금 시장에 진입했다.
현물 가격 상승은 선물 매수를 자극했고 선물 가격 급등은 다시 ETF 자금 유입을 확대하는 구조가 형성됐다.
실물 유통망의 취약성도 가격 왜곡을 드러냈다. 관세 해석 논란이 불거진 이후 뉴욕 선물 가격과 런던 현물 가격 간 스프레드가 크게 벌어졌다. 한때 뉴욕 금 선물이 온스당 3534달러를 기록할 때 런던 현물 가격은 약 3396달러 수준에 머물렀다. 금 시장에서 4~5% 수준의 가격 괴리는 이례적이다.
이는 지역별 유통과 정책 환경에 따라 금 가격이 분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시기 상하이 시장에서는 런던 현물 대비 높은 프리미엄이 형성됐다.
상하이 선물 가격이 더 높게 형성되면서 차익거래가 활발해졌고 중국 내 등록 창고 재고는 빠르게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소매 금 장신구 수요는 감소했지만 금융 투자 목적의 금 수요는 확대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금 시장의 변동성 구조도 변화했다. 과거에는 금 가격이 1~2% 움직이는 데 며칠이 걸렸지만 최근에는 하루에 3~4% 변동하는 사례가 반복됐다. 런던 현물 시장의 평균 호가 스프레드가 과거보다 크게 벌어졌다는 보고도 나왔다. 대형 금융기관들이 유동성 공급자로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시아 거래 시간대의 가격 변동이 하루 전체 흐름을 결정하는 사례도 늘었다. 실물 금의 운송과 통관에 걸리는 평균 리드타임 역시 팬데믹 이전보다 크게 늘어나면서 금융 가격이 실물 거래 조건에 선반영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금 가격 형성이 실물 흐름보다 앞서 움직이는 구조가 일상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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