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중국에 대한 AI 반도체 수출 규제를 일부 완화한 직후 중국 정부가 자국 기업을 상대로 미국산 AI 칩 사용을 자제하라는 압박에 나섰다.
미국은 규제 강화를 유지하면서도 저성능으로 조정된 AI 칩의 중국 수출을 조건부로 허용했고 중국은 이를 다시 문제 삼으며 사용을 꺼리게 만드는 방향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의 핵심 공급자인 엔비디아가 양국 정책의 한가운데에 놓였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는 2022년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본격화됐다. 핵심 목적은 중국이 AI와 슈퍼컴퓨터 기술을 군사 분야에 활용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
이에 따라 엔비디아의 A100과 H100 같은 고성능 GPU는 중국 수출이 금지됐다. 이후 엔비디아는 성능을 낮춘 A800과 H800을 중국 전용 모델로 설계해 제한적으로 공급했지만 규제가 단계적으로 강화되면서 이마저도 사실상 막혔다.
이런 환경에서 등장한 제품이 H20이다. H20은 최신 AI 칩인 H200은 물론 한 세대 전인 H100보다도 성능이 크게 낮은 모델이다. 연산 성능과 메모리 대역폭을 의도적으로 제한한 규제 대응용 제품으로 분류된다. 성능 지표 전반에서 H20은 H100과 H200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에 머문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2025년 8월 8일 H20의 중국 수출을 조건부로 허용했다. 조건은 명확했다. 중국에서 발생하는 해당 칩 매출의 15%를 미국 정부에 납부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조치로 엔비디아는 H20을 중국에 수출할 수 있게 됐고 AMD 역시 MI308 칩의 중국 수출이 허용됐다.
매출 구조를 보면 H20의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2024년 기준 엔비디아 전체 매출 가운데 중국 비중은 약 13.1%로 집계됐다. 같은 시기 H20 매출은 전체 매출의 약 15%를 차지했다.
단순 계산으로 보면 중국에서 발생하는 엔비디아 매출의 대부분이 H20에서 나온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고성능 제품이 차단된 상황에서 중국 시장은 사실상 H20 단일 제품에 의존하는 구조로 재편돼 있었다.
이런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의 수출 허용 조치가 나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중국 정부가 자국 기업에 미국산 AI 칩 사용을 자제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표면적인 이유는 보안 우려였다. 중국 당국은 미국산 AI 칩에 해킹 장치나 보안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 조치 이후 중국 내에서 H20 수요가 급격히 위축됐고 엔비디아는 공급사에 H20 생산 중단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토종 AI 모델 개발사 딥시크가 차기 모델을 중국산 칩에서 구동하겠다고 밝힌 점도 이런 흐름에 영향을 줬다.
엔비디아는 반박에 나섰다. 젠슨 황 최고경영자는 자사 GPU에 백도어나 원격 차단 장치 같은 기능은 존재하지 않으며 상업용 제품으로만 설계됐다고 밝혔다. 엔비디아는 공식 블로그를 통해서도 GPU에 킬 스위치나 스파이웨어를 넣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사업적으로 모두 부적절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하드웨어 수준에서 몰래 정보 수집 장치를 삽입하는 것은 글로벌 시장에서 곧바로 신뢰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한편 미국이 저성능 AI 칩을 중국에 제한적으로 허용한 배경에는 다른 계산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은 중국이 미국산 AI 칩을 완전히 쓰지 못하게 될 경우 화웨이 같은 자국 반도체 기업에 전면적으로 의존하게 될 가능성을 경계해왔다.
중국이 독자 생태계로 빠르게 전환하는 것이 오히려 기술 격차를 줄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성능이 제한된 칩이라도 공급을 유지해 중국이 일정 수준 미국 기술에 의존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보 측면에서도 이런 전략은 의미를 갖는다. 엔비디아 칩을 사용하려면 CUDA 같은 독점 소프트웨어와 드라이버가 필요하다. 이 소프트웨어 환경에서는 사용 패턴과 성능 지표가 통계 형태로 집계된다. 이는 소프트웨어 생태계 운영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데이터다.
중국 기업이 어떤 규모로 GPU를 도입하고 어느 분야에서 활용하는지는 계약 구조와 라이선스 관리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연구 결과 역시 논문과 학회 발표를 통해 외부로 공개된다. 칩 자체가 정보를 보내지 않더라도 사용 과정 전반이 기술 생태계 안에서 노출되는 구조다.
중국 정부가 이를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낮다. 중국은 미국이 H20만을 예외적으로 허용한 의도를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전면 금지 대신 보안 이슈를 앞세워 사용을 위축시키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는 미국의 전략적 의도를 흔들면서도 자국 AI 산업이 즉각적인 타격을 받는 상황은 피하려는 계산으로 해석된다.
중국의 현실적인 제약도 존재한다. 화웨이의 Ascend 계열 칩이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대규모 AI 모델 학습과 상업적 활용에서는 아직 성능과 안정성이 충분하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산 AI 칩을 완전히 끊을 경우 중국 AI 산업 전반의 성장 속도가 급격히 둔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중국은 미국의 의도를 경계하면서도 일정 수준의 수입을 유지하는 방향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상무부 자료에 따르면 2025년 화웨이 Ascend 칩 생산량은 약 20만 개로 추산된다. 2026년에 생산이 두 배로 늘어나더라도 중국 전체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동시에 엔비디아는 H20 이후를 겨냥한 규제 준수형 신형 칩을 2025년 말에서 2026년 초에 출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로 인해 2026년까지 중국이 미국산 AI 칩 의존을 완전히 끊기는 어려운 구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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