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6월 29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연방준비제도(연준) 이사 해임 시도를 막았다. 대법관 9명 가운데 5명이 리사 쿡 이사의 손을 들어줬다. 트럼프 대통령이 쿡 이사를 겨냥해 벌인 해임 소송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가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결정이다.
연준은 미국의 중앙은행으로 기준금리를 정해 물가와 경기를 관리하는 기구다. 대통령이 이곳 이사를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게 되면 통화정책이 정권의 입김에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가 오래 이어져 왔다. 미국 법은 연준 이사를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만 해임할 수 있도록 정해 두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쿡 이사를 해임한다고 밝혔다. 쿡 이사가 2021년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때 서로 다른 두 집을 각각 '실거주지'라고 신고해 더 유리한 대출 조건을 얻었다는 모기지 사기 의혹을 사유로 들었다.
쿡 이사는 연준에 들어오기 전 일이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곧바로 소송을 냈다. 연준 111년 역사에서 이사가 해임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2021년 지명한 쿡 이사는 연준 이사가 된 첫 흑인 여성이다.
지난해 9월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은 쿡 이사의 해임을 막는 예비적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후 연방항소법원도 트럼프 행정부의 긴급 항고를 기각했고 대법원도 10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올해 1월 구두변론을 거쳐 이번 결정을 내렸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쓴 다수의견은 이번 사건이 정부가 하급심 판단을 멈춰 달라고 요청한 형태로 올라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경우 정부가 본안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결론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사를 해임할 '정당한 사유'의 기준이 결코 낮지 않다고 봤다. 연준의 설계에서는 독립성 자체뿐 아니라 독립적으로 보이는 모습까지 중요하기 때문에 해임 문턱이 높아야 한다는 판단이다.
과거의 사소한 실수까지 해임의 구실로 쓰일 수 있다면 이사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표결할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덧붙였다.
브렛 캐버노 대법관은 별도 의견에서 대통령이 판사의 심사도 받지 않고 어떤 이유로든 연준 이사를 해임할 수 있다는 정부 측 주장을 받아들이면 연준의 독립성이 심하게 흔들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쿡 이사는 결정 직후 성명에서 이번 사건이 오래전 서명한 서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압력에 굽히지 않고 금리를 정한 데 대한 표적이었다고 밝혔다. 반면 모기지 사기 의혹을 처음 제기했던 빌 펄트 연방주택금융청장은 쿡 이사가 결국 기소될 것이라며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같은 날 정반대 성격의 판결도 내놨다. '트럼프 대 슬로터' 사건에서 대법관 6명이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 리베카 슬로터를 해임한 것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FTC는 소비자 보호와 공정 경쟁을 감독하는 독립 기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3월 별다른 사유 없이 "행정부 우선순위와 맞지 않는다"며 슬로터 위원을 해임했다.
이는 기존 관례와 어긋난다. 1935년 '험프리스 이그제큐터' 판결에서는 대통령이 독립 기구 위원을 마음대로 해임하지 못하도록 막아 왔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견제하는 이 원칙 위에서 의회는 여러 독립 기구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로버츠 대법원장은 다수의견에서 행정 권한을 행사하는 공직자는 대통령이 언제든 해임할 수 있어야 헌법의 삼권분립에 맞는다고 밝혔다. FTC가 약 80개 법률을 집행하며 사실상 행정 권한을 행사한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이 판결로 FTC 위원은 대통령이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자리가 됐다.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반대의견을 법정에서 직접 낭독했다. 대법관이 반대의견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은 강한 이견을 드러낼 때만 나오는 드문 일이다. 그는 이번 결정이 대통령에게 과거 영국 국왕에게도 없던 권한을 안겨줬다고 비판했다.
대법원은 다만 연준은 다른 독립 기구와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FTC 판결이 연준 이사의 해임 제한 규정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연준을 독특한 구조와 역사를 지닌 기구로 봤다.
쿡 이사의 임기는 2038년까지다. 트럼프 대통령이 해임을 계속 밀어붙이려면 '정당한 사유'를 입증할 증거를 내고, 쿡 이사가 반박할 시간을 준 뒤 그 반박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까지 보여야 한다.
(썸네일 사진 출처: 미국 대법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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